그 문은 요새를 오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전시에는 적의 첫 번째 목표지만 평시에는 성곽의 외관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의자 역할을 한다. 수원화성은 북쪽의 장안문, 남쪽의 팔달문, 동쪽의 창룡문, 서쪽의 화서문이 있다. 이 가운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수원화성을 대표한다. 크기가 크고 홍예의 누에에는 2층 높이의 팔작지붕이 있어 화려하고 웅장하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작은 단층선이다. 네 개의 문이 모두 아치형 적문을 안팎으로 형성하고 있다. 홍예에서는 나무 문 위에 두 쌍의 쇠잎을 얹고 그 위에 커다란 빗장을 얹었다. 홍예 위에는 불이 났을 때나 적이 불을 질 때 물이 빨리 꺼질 수 있도록 대비하는 물탱크가 있다. 구멍이 다섯 개 있어서 오성이라고 한다. 2층에는 적의 동정을 볼 수 있는 누각이 설치되어 ..
6.25전쟁 때 훼손된 성곽을 '화성의 달달함'으로 지칭해 복원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팔달문~동남각루 사이 궁궐 일부가 복원되지 않았지만 수원화성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 건설은 정조의 효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정조가 신도시인 수원에 개혁정치의 이상을 전파하고 실현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정치권을 장악해 온 노론붕파1의 권력은 탕평정책과 규장각 설치로 약화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듬해 수원화성이 완성되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정조처럼 현명한 왕은 이 땅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 사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아름다운 자태에는 변함이 없다. 누구든지 반나절만 보내면 유서 깊은 수원화성을 찾..
수원화성이 성곽에서 벽돌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며, 돌과 벽돌은 제대로 교차하였다. 팔달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을 둘러싼 벽이 지금도 아름답다. 넓은 평지 도시 지역을 수용하여, 이 읍성과 방어 기능을 결합하였다. 수원화성은 그동안 건축문화에서 정치·상업기능이 산업계로부터 고무되고, 실용성과 합리적 구조·구조가 과학적으로 배치되는 등 건축문화의 큰 혁신이었다. 게다가 그는 우아하고 장엄하다. 사대문 밖에는 서울 동대문에만 있는 적을 막기 위해 작은 옹성이 설치되었다. 대문에 또 5홀짜리 물탱크를 설치해 적이 발포할 경우를 대비해 물을 저장했다. 사대문 사이, 4문 사이, 4문 사이, 4대 반역자, 3공심돈, 1봉돈, 5장대, 4각누, 5각누, 5각누, 5각누, 5각누, 5각누, 5각누, 5각누, 5각누..
수원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수원화성은 한국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세계 최초로 계획된 신도시로 국내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 흡수하는 완벽한 도시벽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1794년(정조 18) 2월에 시작하여 2년 6개월 만에 완공된 수원화성은 이 기간 동안 동원할 수 있는 역량과 기술을 총동원하였다. 조선의 성곽은 임진왜란(1592년) 때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요새의 방어 체계와 능력에 대한 우려가 이어졌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낸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전쟁이 끝나자 '징비록'을 쓰고 "옹성과 치성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말은 앞으로 수원화성 건설에 크게 반영되었다. 원래 수원시 행정사무소는 지금의 수원시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성군 태안면 송..